사랑했던 사람은 곁에 없지만 사랑했던 마음은 남아있어요
홀로남아 이렇게 생각해봐도 어쩌면은 그것이 잘된일이야
어느날 우연히 사랑을 알게됐지만 사랑을 하면서 슬픔은 커져만가고
서로가 서로를 더깊이 이해 못하면 우리의 갈등은 자꾸만 커져갔지요
나혼자면 어때요 난 아직 어린걸 슬퍼지면 어때요 울어버리면 되지
떠난 님이 그리워 방황하고 있어요 미워할수없는데 어떡해하나

어느날 우연히 사랑을 알게됐지만 사랑을 하면서 슬픔은 커져만가고
서로가 서로를 더깊이 이해 못하면 우리의 갈등은 자꾸만 커져갔지요
나혼자면 어때요 난 아직 어린걸 슬퍼지면 어때요 울어버리면 되지
떠난 님이 그리워 방황하고 있어요 미워할수없는데 어떡해하나
나혼자면 어때요 난 아직 어린걸 슬퍼지면 어때요 울어버리면 되지
떠난 님이 그리워 방황하고 있어요 미워할수없는데 어떡해하나

 

데뷔: 1976년
활동시기: 1970~80년대 솔로활동과 오빠 장현과 듀엣으로 활동
생년월일: 1962년 4월 21일
사망: 1990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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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지식편집자 : mouseskr (level 10) l 2004-10-21 01:23 작성


1990년 2월 4일. 이상은이 ‘담다디’로 겅중거렸고, 이선희가 시집을 발표했으며,
김완선과 이지연이 누나부대를 몰고 다니던 그 무렵이었다.
아 물론, 변진섭과 이승철이 쌍벽을 이뤘고 홍콩 느와르가 유행하던 그 무렵이기도 하다.
스물아홉, 한 여자 가수의 죽음이 알려졌다. 밝혀진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이다.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귀여운 외모, 씩씩한 무대매너.

그런데도 죽음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로 그는 늘 우울했다.
죽기 전 묘하게도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란 노래를 불렀다.
그의 보이쉬한 평소 패션 코드와 달리 공주처럼 꾸민 화려한 자켓 사진에다,
일설에 의하면 1989년 어느 날 동료였던

양하영과 임병수를 불러 놓고 “맘에 드는 곡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던 일화.
그래서일까.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추측이 돌았다.

최초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

장덕의 죽음을 두고 넋두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장덕을 기억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바로 ‘자랑스러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장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단발머리의 소녀가수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건 아닐까?
그가 즐겨 입던 쫄바지와 패드가 두툼하게 들어간 헐렁한 자켓,
즐겨 쓰던 동그란 빵모자-지금으로선 조금 촌스러운-와 같은 그 패션감각은 아닐까?
이전에도 그를 말할 때 싱어송라이터나 프로듀서란 말보다는
그의 예쁜 외모와 늙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에 대한 찬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다. 그 당시로서는 드문 싱어송라이터였고
그의 곡을 부르고 싶어했던 많은 동료 가수들을 가진 음악인이었다.

장덕의 등장은 1977년 ‘소녀와 가로등’때였다.
이 곡은 진미령이 불렀는데 국제 가요제의 규정상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던 장덕이 빵모자를 눌러쓰고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렇게 데뷔한 장덕은 1980년대 당시에는 신세대적인 감각이 출중했던 가수이자 프로듀서였다.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갑작스런 비보를 안타까워했으리라.
그의 장례식 날 이선희가 자신의 시집에서 추억하길 “너무 많이 남은 너의 삶을 묻어야 했을 때.
나는 무서웠다”라고 했고, 지예가 별밤 추모 콘서트에서 “이제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라고 통탄했다.
박혜성이 그의 사진을 안고서 장례행렬에 섰고 동료들이 그가 만든 대표 곡들을 모아 추모음반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 장의 추모앨범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5장의 솔로 앨범과 베스트 앨범,
사후의 추모앨범 그리고 현이와 덕이 때 앨범까지 합한다면 약 8여장의 앨범을 만들었다.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였고 MBC국제 가요제의 3년 연이은 수상곡 작곡자였다.
1987년에는 ‘님 떠난 후’란 3집 앨범의 타이틀 곡이 가요톱텐 연속 5주 1위라는 히트행진을 했었고,
테네시 대학에서 정식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미국 유학생활을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먹히는’ 그의 곡으로는 신수경, 조성모 등의 가수들이 리메이크 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장덕이 작곡해서 이은하가 불렀던 이 곡은
왁스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다시 부르며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고,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천생 연분>에서 황신혜가 울면서 이 노래를 불러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주 많은 음악인을 이야기할 때, 그의 수많은 활동이력들보다
수수께끼 같은 죽음, 오빠 장현의 동생이라는 것,

혹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울한 기질이 있었던 가수였다는 점
등이 첫머리에 꼽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판 카펜터즈를 꿈꾸던 그의 음악인생

장덕은 첼리스트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오빠 장현도 일찍 음악을 시작해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부모의 이혼 이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는 동양사상에 빠져든 아버지와
음악활동에 바쁜 오빠 사이에서 늘 혼자 집을 지키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
나중에는 오빠와 드래곤 랫츠(Dragon Rats)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판 카펜터즈를 꿈꾸었다.
전에도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늘 오선지와 씨름하며 노래를 불렀고
<누가 누가 잘하나> 등의 프로에 여러 번 입상한 경력이 있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이 MBC국제 가요제에서 입상했고,
국제 가요제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1977년 진미령 이후 3년 연속으로 수상곡 작곡자가 된다.
연예계로의 데뷔는 <마음의 행로>에 출연하면서부터였는데
곧이어 ‘현이와 덕이’라는 남매듀오로 음악계에 신고식을 치루었다.
안양예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10여 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역스타로도 급부상한다.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작곡공부를 했지만
짧은 결혼생활에의 번민과 향수병에 시달리며 한국으로 다시 도망치듯 들어와
솔로로서의 첫 앨범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그러나 3년간의 공백과 바뀐 가요계 환경은 그에게 냉담했다.
이때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우울증 증세가 깊어졌고
식음을 전폐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그러던 중 그를 정상에 올려준 곡이 바로 1987년 가요톱텐 연속 5주 1위곡이었던 ‘님 떠난 후’다.
당시로선 멜로디나 목소리, 노래 스타일 등에서 파격적인 면을 보여줬다.
장덕의 3집 앨범은 1986년 뮤직박스 차트 20위 권에 들기도 한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까지
아울러 수준작으로 평가 받는다.
그 당시 신선한 반응을 얻었던 이선희나 정수라와 함께,

실력과 독특한 스타일 면에서 주목 받는 가수로 떠오른다.
또 작곡가로서 이선희, 진미령,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에게 곡을 주면서
자신의 앨범 프로듀싱 뿐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장현도 그 동안의 밤무대 생활을 정리하고 코아기획이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해
장덕에게 더욱 힘을 주려고 애썼고, 장덕 스스로도 팬클럽 코알라를 만들 구상을 하며
자신의 팬 층을 조직화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4집 앨범에서는 김파의 곡인
‘얘얘’와 김범룡의 곡인 ‘서울의 밤거리’란 타 작곡가들의 곡을 실으며
새로운 시도를 하려 애를 썼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다.

1989년은 이상은이 ‘담다디’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신선한 얼굴의 많은 가수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던 때다.
김완선의 현란한 댄스나 이지연의 청초한 목소리, 이승철과 변진섭이란 남자가수들의 라이벌 대결,
대학가요제 출신의 무한궤도가 배출한 신해철 역시 이 당시 가요계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88년의 ‘얘얘’가 든 4집 앨범은 10대 취향이라는 평을 받았고 인기몰이에도 실패했다.
뒤이어 1989년에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하지만 반응은 썰렁했고,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로 그를 뒷받침해주던 오빠 장현의 설암 판정으로

장덕은 오빠와 오빠 가족들을 돌봐야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이전의 우울증이 재발했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KBS드라마 <구리 반지>와 6집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결국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4주기를 맞는 장덕을 추모하며

장덕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4년째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곱씹으며 노랫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했고,
그의 앨범은 서서히 절판되어갔다. 어머니가 낸 책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도 절판된 지 오래다.
사람들은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를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를 이제 분명히 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장덕이라는, 최초의 국내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하던 여자가수들 중 이지연은 비록 사랑을 찾아 떠났지만,
김완선은 여전히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고, 이선희는 콘서트에 나름대로 매진하고 있으며,
특히나 이상은은 홀연히 돌아온 신비롭고 철학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가슴을 찡하게 해주었다.
세상과 그의 내면세계는 철저히 불화했지만 한 쇼 프로그램에 나와
송창식의 ‘참새와 허수아비’를 능청스레 부르는 배짱이 있었던 장덕이었다.

나는 그가 그저 수면제에 의존해 나약하게 죽어간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열일곱의 나이에 자작곡을 들고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죽기 얼마 전까지도 양하영과 임병수에게 자신의 곡을 선물했으며,
지금까지 가수들에게 다시 불려지는 곡을 작곡했고,
1980년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보고 들었던 사람들의 기억에 ‘님 떠난 후’나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와 같은 선율을 남긴 그다.
유재하를 비롯한 비슷한 시대, 비슷한 배경의 남성음악인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함에도
왜 장덕에 대한 재평가는 미비한 것일까. 그도 정식으로 작곡을 공부했고 자작곡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음악이 소통되는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 12월 ‘이즘’이란 음악 웹진에서 칼럼리스트 지운은
“어쩌면 1980년대 음악의 끝은 고 유재하의 죽음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아니라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적 감성이 설령 지금의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거나 기술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서의 장덕을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음악인들을 지금도 찾기 어려운 이 시점에서 말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주문정언 기자
2004-03-01 ⓒ www.ildaro.com


장덕-하이틴 스타에서 비운의 스타로

굴곡진 삶에 지친 천재소녀, 하이틴 스타에서 비운의 스타로
1990년 2월 4일. 스물아홉의 한 여자 가수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장덕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였다.
항상 발랄한 이미지의 소녀 같았던 그녀의 죽음에 많은 대중이 의구심을 가졌다.
또한 6개월후 남매 듀엣 ‘현이와 덕이’로 함께 활동했던 오빠 장덕의 잇단 죽음도 충격이었다.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단발머리가 상징이었던 장덕에게는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하지만 이미 중 2때 진미령이 불러 빅히트한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했던 그는
여성 싱어- 송 라이터가 드문 대중 음악계의 천재 소녀 뮤지션이었다.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규상씨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이숙희씨 사이에 1남 1녀 중 막내로 1962년 4월 21일 태어났다.
5살 많았던 장현은 동생에게 하모니카로 동요 ‘오빠 생각’을 연주해 줄 만큼 사이가 좋았다.
충무로 4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흥인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이혼을 해 전 가족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뿐철학’이라는 동양 사상에 심취했던 아버지를 따라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
그 때 오빠에게 기타를 배웠다. 부친은 늘 집을 비웠고 남의 집 가정 교사를 했던 오빠 장현도
밤 늦게 들어와 장덕은 빈 집에서 기타를 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어설프게 작곡을 시작한 이 때가 초등학교 6학년.
그녀는 창작은 물론 첼로, 피아노 연주, 그림과 글짓기에도 재능을 지닌 소녀였다.
노래를 잘 불렀던 그녀는 ‘누가 누가 잘하나’등 TV방송의 동요 경연 대회에 나가
1등 입상을 여러 번 했을만큼 음악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불우했던 가정사 때문에 당시 그녀의 곡들은 어둡고 쓸쓸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 다닌 후 1974년 서울사대부중에 입학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더욱 우울한 성격으로 변해 급기야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가출도 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즈’처럼
오빠와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주었다.
처음 남매 듀엣의 이름은 ‘드래곤 랫츠’.
미 8군 쇼 무대에 출연해 통기타를 연주하자 곧바로 방송국 PD들에게 스카우트 되었다.
75년 5월 TBC TV ‘오라오라’에 출연해 창작곡 ‘꼬마 인형’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를 했다.
중3이 된 76년 4월. 자작곡 ‘친구야 친구야’ 등 3곡이 수록된 데뷔음반(오아시스)을 발표해 주목을 받으며
임현식 감독의 ‘마음의 행로’ 등 3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깜직한 외모의 장덕은 단숨에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해인 77년 안양예고에 진학했다.
그 해 진미령에게 ‘소녀와 가로등’을 주어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했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다.
그래서 여고생 장덕이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78년 장현의 ‘더욱 큰 사랑’, 79년 박경희의 ‘사랑이었네’, 80년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등
3년 연속 출품한 곡이 모두 입상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작곡가로도 유명해진 장덕은 영화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는 하이틴 영화 열풍기. ‘우리들의 고교 시대’, ‘선생님 안녕’ 등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음악도 여러 편 작곡했다.
그녀는 고교 졸업 때 까지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
이후 장덕은 솔로로 독립하고 장현은 록 그룹 ‘현이와 거룩한 성’을 결성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혼 후 갈등을 겪으며 가짜 중과 가출했다는 소동을 빚고는
동맥을 끊고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여러 사건에 휘말렸던 79년 10월 친 어머니가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델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어학 연수를 겸해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로 옮겨 2년 간 작곡 공부에 전념했다.
이 때 내쉬빌 작곡가협회에 가입하고 한인 기독교방송에서

‘한국인의 샘터’라는 프로의 MC로 1년간 활약을 했다.
하지만 유학 시절 향수병에 시달려 빠져 든 전자 포커 게임으로 등록금을 날리기도 했다.
그 때 자신을 아껴준 이모씨와 81년 10월 미국 내쉬빌에서 결혼을 해

가족 보컬 그룹 ‘리 패밀리’를 결성해 활동했다.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출연 하면서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결국 삶에 대한 번민으로 이혼을 하고 83년 10월 귀국을 했다.
귀국 후 한남동에서 자취를 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잊혀진 가수였기에 어렵게 3년간 1,000만원의 계약으로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이 되었다.
발표한 첫 앨범은 어머니 몰래 귀국했던 당시의 심경을 담은 <날 찾지 말아요>.
영화<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 작업을 맡는 등 재기했지만 3년간의 공백은 컸다.
밤 늦도록 거리를 방황한다는 동생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울산에 살던 오빠 장현이 상경해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했다. 85년 이들은 재결성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다행히 수록곡 중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날 찾지 말아요’ 등
예전의 히트곡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자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적 견해가 달랐던 남매는 1년만에 듀엣 활동을 중단하고 각각 솔로로 나섰다.

한 천재 뮤지션의 예정된 삶, 못 다 피워낸 음악적 재능

솔로로 독립한 장현은 ‘잠 못드는 밤’‘만날 수 없는 밤’을 발표했고

장덕은 귀국 후에 작곡한 ‘님 떠난 후’ 를 발표했다.
화려하게 부활의 날개를 활짝 편 것은 동생 장덕.

‘님 떠난 후’는 KBS TV 가요 톱 텐에서 연속 5주 1위를 차지했고
MBC라디오 ‘금주의 인기가요’, PCI 뮤직 박스, 전국 DJ 연합회 차트 등 각종 인기 순위에서 정상에 등극했다.
TV와 신문 등 주요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게 된 장덕은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이선희, 정수라와 더불어
여성 트로이카 가수 체제를 구축했다. 이들은 치마보다는 바지를 즐겨 입어 ’바지 삼총사‘로 불렸다.
싱어 송 라이터였던 장덕은 이선희,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에 곡을 주어 히트 넘버를 기록했다.
또한 자신의 앨범뿐 아니라 동료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도 참여해 음악 프로듀서로도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이은하가 불러 빅 히트했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조성모, 왁스, 신수경 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그녀의 명곡이었다.

이 곡은 최근 TV드라마 ‘천생연분’에서 황신혜가 애절하게 불러 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오빠 장현은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동생의 체계적인 뒷받침을 위해 밤 무대 생활을 정리했다.
그래서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의 가수들을 영입해 음반 매니지먼트사 '코아기획'을 창립했다.
장덕은 팬 클럽 ‘코알라’를 만들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87년 6월 장덕은 석래명감독의 ‘아스팔트위에 동키호테’에 여대생 수지 역으로 주연배우로 픽업되고
골든 앨범도 발표했다. 87년 9월엔 한국대표로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회 ABU가요제에 출전했다.
1988년 4집 앨범에서는 댄스 풍의 김파 곡 ‘얘얘’와 김범룡 곡 ‘서울의 밤거리’를 발표해
특히 지방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정상의 가수로 도약한 후 생겨난 주위의 시샘은 늘 부담스러웠다.
1989년 유작이 된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했지만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또한 오빠 장현이 설암 판정을 받으며 쓰러졌다.

좌절 속에 음악활동을 접고 오빠 가족들을 돌보게 되면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우울증 증세가 도졌다. 90년 1월 21일 출연한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무대는
대중 앞에 나타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장덕은 1990년 2월 4일 29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경찰은 “세 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 사망”으로 최종 판명을 내렸다.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을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이에 이선희는 3월에 장덕 추모시를 써 자기 시집에 수록했다.
90년 6월, 장덕의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되었다.
추모앨범에는 전영록, 위일청, 이선희, 임지훈, 김범룡, 지예,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양하영 등이 참여해
그가 작곡한 미발표 곡까지 담아 의의를 더 했다. 하지만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7개월 후 8월 16일.
시한부 인생을 살던 오빠 장현도 3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컸다.
이에 92년 3월, ‘현이와 덕이’ 유작 앨범이 발매되고
어머니 이숙희씨는 93년 1월 남매의 숨겨진 과거을 담은 감동적인 수기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김광석, 유재하, 김현식 등 많은 요절 가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장덕에 대한 재평가가 전무하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많은 곡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건만 현재 그는 잊혀진 가수가 되었다.
동시대의 여자 가수들 중 이선희는 준 국민가수 급의 대접을 받으며
데뷔 20년 무대를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 치러냈다.

늘 비운의 가정사로 인해 우울했지만 TV 쇼 프로그램에 나와
송창식의 ‘참새와 허수아비’를 능청스레 부르는 배짱이 있었던 장덕.
그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불행한 가수로만 기억되기에는 억울한 뛰어난 음악성의 뮤지션이었다.
열 여섯의 나이에 자작곡을 들고 국제 가요제에 출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지금까지도 리메이크의 대상이 되는 명곡을 작곡한 아티스트였건만
그녀에겐 늘 반짝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가 선명함은 왜 일까?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이 준 충격이 강해서 일까?

‘현이와 덕이’는 비운의 가수로만 대중에게 회자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맛 본 대중적 인기의 달콤함에 너무 연연한 탓일까?
고통을 딛고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보단
팬들의 반응에 음악 활동의 가치 판단을 우선으로 둔 생전의 음악적 태도는 그래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를 벗고 신비롭고 철학적 분위기의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을 하며
아티스트로 대접 받는 이상은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보기 드문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 주옥 같은 곡들을 남긴
그녀에 대한 대중 음악계의 재평가 작업은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그나마 금년 9월 얼굴 없는 여고생 가수로 유명한 ‘리브가’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리메이크한 ‘Leave-歌’를 발표한 것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 ) 추억의 LP여행 200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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