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I 미국 HBO

방영 I 1998-04-05 ~ 1998-05-10 (총 12부작)

책임프로듀서 I 톰 행크스

원작 I 앤드류 차이킨의 '달 위의 남자(A Man on the Moon)'

 

항상 최초의 수식어를 러시아에 뺏기며 쫓아가기 바빴던 미국이

어떻게 인간을 달까지 보낼수 있었는지에 대한 드라마.

 

<파트 1 -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각본 - 스티븐 카츠 / 감독 - 톰 행크스

1957년 러시아가 스푸트니크 호를 최초로 우주에 쏘아 보내자 미국은 곧바로 우주 비행사를 양성한 머큐리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6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2인승 우주선 발사계획인 제미니(Gemini) 프로젝트를 세운다.

총 12회에 걸친 제미니 호의 발사 경험은 이후 1967년부터 진행되는 아폴로 프로젝트의 소중한 디딤돌이 된다.

제미니 프로젝트 중 4호에 탐승했던 E.H.화이트 비행사는 23분간 미국 최초의 우주유영에 성공하였고,

7호는 지구를 13일 18시간 35분 날아 장시간의 우주비행 기록을 수립하였다.

 

<파트 2 - 아폴로 1호>

각본 - 그레이엄 요스트 / 감독 - 데이비드 프랭클

제미니 프로젝트로 인해 얻어진 우주유영, 도킹, 착륙 등 여러 데이터를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아폴로 프로젝트가 수립, 계획된다.

계획대로라면 7번째 팀에 달착륙까지 하는 것으로 정해지는데

1967년 1월 27일, 지상테스트과정에서 아폴로 1호 선실내부화재로

거스 그리섬, 에드워드 H.화이트, 로저 채피 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사망한다.

NASA, 노스 아메리칸사는 원인규명에 나서고

바로 시작된 청문회에선 상원위원들이 베트남전 등 미국 내외의 산적된 문제들을 이유로

아폴로 계획을 취소시키려 하지만

우주비행사인 프랭크 보먼의 증인진술 이후 마음을 바꿔 프로젝트는 지속되게 된다.

 

<파트 3 - 발사대를 통과했다>

각본 - 레미 오부숀 / 감독 - 릴리 피니 재넉

아폴로 1호의 백업승무원이었으며 이후 아폴로 7호에 탑승하는

월터 시라, 월터 커닝햄, 돈 아이젤이 아폴로 7호 발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른 이야기.

TV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폴로 7호는 비록 지구 저고도 선회비행이지만 66년 11월 제미니 12호 이후

아폴로 계획으로는 최초의 유인우주 발사실험이었으며 68년 10월 11일에 발사되어

260시간 동안 지구를 163회 선회하였다.

3인승 주 사령선의 기능시험이 목표였으며 유인우주선으로는 최초로 텔레비젼 생중계를 하였다.

사고만 아니었다면 아폴로 1호가 67년 2월에 발사될 예정이었다.

그때 사고로 계획은 1년 8개월 이상 지체되었으나

그것은 큰 프로젝트의 시작점에서 액땜같은 사건이 되었고

이후 성공적으로 아폴로 프로젝트가 지속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아폴로 13호라는 사고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비행사 3명을 온전히 되돌아오게 했던

'성공적인 실패'였다.

발사장 책임자로 귄터라는 독일계 미국인이 나오는데 이처럼

2차대전시기 영국을 향해 발사되던 V2로켓을 개발한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독일계 과학자들이

미국 우주개발시기에서 중추적인 일을 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면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이들의 일정이 빠듯했던 것은 러시아와의 경쟁때문이기도 했지만

케네디가 60년대가 끝나기 전까지 인간을 달로 보낸다고 했던 선언이 암묵적인 데드라인처럼 된 이유도 있었다.

그나저나 새턴 IB로켓의 발사장면은 지금봐도 장관이다.

 

<파트 4 - 1968년>

각본 - 앨 라이너트 / 감독 - 데이비드 프랭클

1월부터 해당되는 달을 비취주며 시간순으로 진행.

한 주에도 수천명의 젊은이가 죽어나가는 베트남전이 한창인 시기이며

반전과 히피의 시대이기도 했던 1968년.

무인로켓이었던 아폴로 6호가 발사되던 4월 4일 마틴루터킹 목사도 저격당했고.

6월 6일엔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F. 케데디 조차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혼란의 해이기도 했다.

8월 즈음 CIA가 러시아에서 4단 대형 로켓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달궤도 비행용 일거라 생각한 정부는 속히 달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조율을 요청하고

결국 프랭크 보먼이 속한 팀이 아폴로 8호를 타고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 출발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한편 워싱턴DC의 NASA본부에서는

비행계획, 목표, 수칙, 소프트웨어도 없는 상태에서 시뮬레이션 훈련도 할 수 없고

달착륙선도 없이 우주선 엔진 하나만으로 보냈다가는 엔진이 불량났을 때 돌아올 방법도 없다면서

회의론이 잠깐 일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주여행에서 그 정도의 위험은 항상 도사린다는 쪽의

주장이 우세하면서 결국 계획을 그대로 밀고 가기로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달궤도 무인우주선인 존드 5호가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인도양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10월중에 전세계에 타전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던 1968년 마지막달 21일.

초초하게 남편의 이륙을 보먼부인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폴로 8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된다.

이 당시 사령선 조종사였던 짐 러벨은 이후 아폴로 13호의 선장이 된다.

그는 달궤도에 두 번이나 갔지만 한 번도 달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22일 달궤도로 가는 도중 보먼이 구토를 하고

휴스턴에선 달궤도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증상이 계속되면 바로 되돌아 오고

나아지면 계획대로 계속 진행하기로 한다.

다행히 다음날 증상은 완화된다.

그러나 보먼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자동귀환궤도를 따라 바로 돌아나오지 않고

달궤도를 하루동안 머물면서 10바퀴나 도는 것을 불안해한다.

이는 1968년 한 해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등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고

보조엔진없이 주엔진 하나로 가는 미션이라 엔진이 재가동되지 못하면

남편을 포함한 우주비행사들이 영영 달궤도의 유령으로 떠다닐까 불안한 것이었다.

아무튼 23일 지구와의 통신두절시기인 달의 뒷면을 사령선이 돌아나오면서

윌리엄 앤더스가 달의 지평에서 올라오는 지구를 찍은 사진은 매우 유명하다.

달궤도 진입 성공을 축하하는 휴스턴.

이후 궤도를 20시간을 도는데 이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들은 생중계된 텔레비전 방송에서 성서의 창세기를 낭독했다.

후에 알려졌지만 러시아는 이들보다 먼저 달왕복을 계획했지만

소유즈 1호 사고 이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가가 나지않아 취소되었다고 한다.

When it is dark enough you can see the strars...

하늘이 캄캄해야 별을 볼 수 있다

- Charles A. Beard

 - 찰스 비어드

 

<파트 5 - 스파이더>

각본 - 앤디 울크 / 감독 - 그레이엄 요스트

달착륙선을 만들었던 톰 켈리가 지난일을 회고하듯이 나래이션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달탐사 방식이 어떻게 해서 '달궤도 랑데뷰'방식으로 정해졌는지에 대한 것과

'달착륙선 3호(Lunar Module 3 'Spider')'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텍사스의 챈스보트사의 엔지니어인 톰 돌란이

20세기초 러시아 로켓과학자 '유리 콘드라튜크'의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흥미로운 착상을 시도하는데

그때만 해도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직접상승'이나 '지구궤도 랑데뷰'의 달탐사 방식을 정설로 믿고 있던시기

작은 크기의 달착륙선을 가지고 가서 탐사를 마친 후

달궤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령선과 다시 랑데뷰를 하는 방식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실현가능성을 낮게 생각했었으나

우연히 이 리포트를 존 허볼트라는 NASA 엔지니어가 발견하면서 이슈화가 되었고

결국 62년 7월 아이디어는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62년 11월 톰 켈리가 이끄는 그루먼사의 착륙선팀이 계약을 따내게 되고

그 후로 7년에 걸쳐 10억불이란 예산을 쏟아부어 그 이전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안았던 달착륙선을 완성시킨다.

1969년 3월 3일 아폴로 9호의 새턴 V로켓에 실려 LM-3 '스파이더'는 우주로 날아가고

지구궤도 상에서 사령선과 도킹 - 우주유영 - 달착륙선 분리후 조종 - 달착륙선 상승단 점화 - 사령선과 재도킹 등의

여러 성능테스트를 완료하였고 이로써 '달궤도 랑데뷰' 방식이 가능함을 증명하였다.

이후 아폴로 10호에 실려간 달착륙선 4호는 달궤도상에서 조종 및 성능테스트를 완료하였으며

달착륙선 5호 '이글'은 아폴로 11호에 실려 실제 달착륙에 사용되게 된다.

이글이 완성되는 날엔 톰 돌란과 존 허볼트도 초대되어 참관한다.

 

<파트 6 - 고요의 바다>

각본 -  앨 라이너트, 그레이엄 요스트, 톰 행크스 / 감독 - 프랭크 마셜

발사전부터 수행한 각종 훈련 상황들과

1969년 7월 20일 달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기까지 과정을 담은 이야기.

달에 먼저 내리는 문제와 미션의 상징성에도 무게를 두었던 버즈.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신경쓰지 않는 닐과 반목하기도 하나

결국 닐이 먼저 달에 내리는 것으로 결정하고 팀워크를 다진다.

 버즈 올드린은 한국전때 전투기 파일럿으로 참전했었고

최근 2007년 재향군인회 초청으로 방한한 적도 있다.

이 당시 달착륙 비행감독관이이었던 '진 크랜츠'는 이후 아폴로 13호의 화이트팀 비행감독관이기도 했다.

 

<파트 7 - 그게 다예요>

각본 - 폴 매커던, 에릭 보크, 톰 행크스 / 감독 - 존 터틀타웁

아폴로 12호 미션수행과정이 주 된 이야기로

달착륙선 조종사였던 앨런 빈이 회상하는 방식으로 종종 나래이션이 삽입된다.

이륙하자마자 번개를 맞아 신호제어장치 이상으로 미션이 중지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되었으나

전기,환경 담당관이었던 존 아론과 신호제어장치 스위치의 위치를 재빨리 기억해내고 조작한 앨런 빈의 기지로 위기를 극복한다.

목표지점에서 3마일이나 벗어났던 11호때와는 다르게

'폭풍의 바다'지역이며 무인탐사선 서베이어 3호가 착륙했던 곳과 불과 180미터 떨어진 거리에 안전하게 착륙한다.

처음으로 달에 내린 피트 콘래드 선장은 그의 성격답게

"야호! 닐한테는 작은 발걸음이었는지는 몰라도 저는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습니다." 라고 재치있게 말한다.

앨런 빈은 우주비행사로 뽑혔을 당시 받았던 은색 뱃지를 달 위에 던져버린다.

아폴로 미션 성공 후에는 금색 뱃지를 주기 때문이었다.

빈은 자신과 같이 아폴로 프로젝트에 들어왔던 14인의 동기중 일부의 행적을 소개하기도 한다.

월터 커닝햄 - 아폴로 7호 탑승

빌 앤더스 - 아폴로 8호 탑승

러스티 슈바이카트 - 아폴로 9호 탑승

테드 프리먼 - T-38 운행중 기러기가 조종석에 충돌하면서 사망

찰리 바세트 - 엘리어트 시가 조종하던 비행기를 탔다가 맥도널 공장에 추락해 사망

로저 채피 - 아폴로 1호 사고로 사망

C.C. 윌리엄스 - 아폴로 12호 달착륙선 조종사로 선발되었으나 T-38기 추락사고로 사망

 1화에서도 T-38 추락사고로 우주비행사 2명이 죽은 에피소드도 나오는데

NASA에서도 사용되던 고등훈련기인 T-38은 한마디로 '우주비행사의 저승사자'였구만.

아무튼 이번 12호의 승무원들은 모두 침착하고 자신감있으며 쾌활한 성격에 끈끈한 팀워크까지 보여준다.

쉐보레 콜벳을 황금색으로 맞춰 같이사서

보직(CDR - 선장, CMP - 사령선 조종사, LMP - 달착륙선 조종사)을 새길 정도로 쿵짝이 잘맞는다.

그들은 월석채취, 지진계설치, 서베이어호 TV카메라 회수 등 총 2회에 걸쳐 8시간에 가까운 월면활동 후

추락사고로 함께 할 수 없었던 C.C.윌리엄스의 비행단 배지를 달표면에 남겨두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미션기장에 별이 4개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원래는 서베이어호 앞에서 휴스턴 몰래 가져간 타이머로 둘이 같이 나오는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타이머를 못찾는 바람에 포기하고 달착륙선에 다와서 찾기는 하지만 사진을 찍지는 않는다.

11호때 달착륙선 상승폭풍으로 어렵게 설치한 성조기가 날아가는 비운을 겪은 바 있어

이번엔 좀 더 떨어진 곳에 설치하였고 상승하면서도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달착륙선의 상단부가 다시 이륙해서 사령선과 도킹하기전 달궤도 비행시 달에 뒷면에 들어 지구와의 통신이 잠시 끈어졌을때

피트는 잠시동안 앨런에게 조종간을 넘겨주는데 이는 실제 달착류선 조종사은 비상시에만 조종을 할 수 있었기에

휴스턴이 모를 때 앨런에게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달착륙선 조종을 경험하게 해주고자 했던 피트의 배려였다.

이후 월면먼지로 더러워진 우주복을 달착륙선에 버려두고 나체로 사령선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팀은 참 유쾌충만한 팀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파트 8 - 아폴로 프로그램을 중단합니다>

각본 - 피터 오스털랜드, 에이미 브룩 베이커 / 감독 - 데이비드 프랭클

톰행크스 주연의 영화 '아폴로 13호'로도 만들어진바 있는 유명한 이야기.

영화와는 다르게 주로 '에밋 시본'과 '브랫 허친스' 이라는 두 명의 언론인과 주변사람들 중심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래서 사건의 긴박감보다는 둘사이의 긴장감이 앞선다.

결국은 언론인의 세대교체라는 불가항력적인 흐름을 둘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비행감독관이었던 진 크랜츠역으로

영화에서는 에드 해리스가 출연했었는데 당시 굉장히 멋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개봉한지 벌써 20년이나 된 영화이다.

드라마 상에선 다른 배우가 출연한다.

톰 행크스는 '아폴로 13호'에 출연한 후 '지구에서 달까지'시리즈를 제작한 것처럼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한 이후 같은 제작진과 방송사에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제작한다.

 

<파트 9 - 멀리 아주 멀리>

각본 - 에릭 보크 / 감독 - 게리 플레더

앨런 셰퍼드가 미국 최초로 프리덤 7호를 타고

우주비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15분 간의 탄도비행을 마친후

불과 8년만에 달에 발을 내딛게 된다.

이번 화는 그가 어떻게 병을 이겨내고 아폴로 14호를 타게 되는지가 주된 내용이다.

그는 종종 심한 현기증을 느꼈는데 귀속에 물이 차는 메니에르 증후군을 앓는 것으로 밝혀져

제미니 프로젝트에서 제외되고 이후 한동안 우주복을 입을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후배들이 마주치기 싫어할 정도로 깐깐한 성격을 보인다.

그러다 후배인 톰 스태퍼드의 소개로 LA에 있는 윌리엄 하우스 박사를 소개받게 되고

아직은 임상단계 정도인 실리콘 튜브를 귀속에 삽입하는 수술을 1968년에 받는다.

성공확률은 60% 정도이고 잘못되서 감염이라도 되면 청력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기에 과감한 결정을 한다.

다행히 청력을 회복하고 아폴로 프로젝트도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디크에겐 아폴로 13호을 달라고 신청했지만 셰퍼드의 팀 자체가

오래쉰데다가 우주비행 경험이 적은 선장과 신참 둘이 포진한 팀이어서

결국 13호는 짐 러벨 팀으로 넘어간다.

이 이야기는 영화 '아폴로 13호'에도 잠시 등장한다.

결국 아폴로 14호를 배정받고 미션에 투입된다.

달 착륙지는 원래 13호가 가려고 했던 '프라 마우로 크레이터'였다.

어떤 미션도 순순히 넘어간 적 없는 아폴로 프로젝트 답게 착륙과정에서 문제가 발성하는데

한 번은 '임무중단버튼'이 활성화 되는 문제였었고 다른 한 번은 착륙레이더가 안켜지는 문제였다.

그러나 두 문제 모두 휴스턴과 협업을 통해 멋지게 착륙에 성공한다.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은 왔어"

- 앨런 B. 셰퍼드 Jr.

이번 미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월면활동은 골프를 친 것 이었다.

6번 아이언으로 한 손으로 치는데 공이 멀리 날아가자 셰퍼드는 "Miles and Miles and Miles" 라고 외친다.

두 번이나 근처에 가고도 달에 못내려본 짐 러벨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동안 우주비행사복을 벗었다가 다시 복귀해서 달을 밟은 셰퍼드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처음에 청력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제미니와 아폴로에도 계속 참여했을 것이고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상징성과 비행사들 중에서도 고참이었기에 아폴로 1호에 탑승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또한 그가 신청했던 것이 정상적으로 통과했다면 아폴로 13호에 탑승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머큐리 계획의 비행사 중 달에 내려간 유일한 비행사이다.

한편 위에 짐 러벨이 불운해보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우주미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 또한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앨런 셰퍼드 - 미 최초 우주비행, 최고령 달착륙

존 글랜 - 미 최초 궤도비행, 최고령 우주비행

 

<파트 10 -  갈릴레이 말이 맞았어>

각본 - 제프리 피스킨, 레미 오부숀 / 감독 - 데이비드 카슨

우주비행사들은 조종사, 엔지니어, 물리학, 천문학, 지질학 등의 교육을 받았고

거기에다 역사학자, 시인, 예술가의 자질이 있으면 더 좋았다.

이처럼 전방위적인 지식과 훈련이 필요했던 이유는

달이 어떤곳인지 알기엔 이들의 경험과 기억을 바로 활용하는 것이기 좋기 때문이었다.

69년 4월 따분하고 지루한 광물학 강의를 듣던 아폴로 15호 백업승무원 팀의 LMP였던 해리슨 슈미트가

과학적인 눈을 띄워줄 선생을 찾아줄 것을 디크 슬레이트에게 건의했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지질학자 리 실버로부터 지질학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NASA로부터 받은 다양한 자료로 달의 나이와 구성물질의 화학성분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직 달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가지의 가설들만 존재했기에

그 기원을 밝힐 지질조사가 이번 탐사의 우선순위로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의회의 압박으로 아폴로 계획은 축소되었다.

아폴로 15호도 기존의 'H미션'은 폐기되고 나머지 임무의 성과를 최대한 얻기 위해

달표면 장기체류, 더 복잡한 월면보행, 성능 개선된 신형 우주복과 백팩으로 과학연구에 더 중점이 된 'J미션'으로 변경된다.

이런 연유로 미션 최초로 월면차를 처음 사용하게 된다.

곧 아폴로 15호가 1차 J미션이며 아폴로 18호 이하 모든 미션은 취소되었다.

때문에 18호에 탈 예정이던 슈미트는 크게 실망한다.

(그는 나중에 아폴로 17호를 탄다.)

발사가 다가오자 선장인 스콧은 디크에게 여러가지를 제안한다.

1. 착륙한 근처 주변 지형 조사차 달 착륙선의 상단부 해치를 열고 기립선외활동을 플랜에 넣어줄 것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조종실 기압조정이 잘못될 위험이 있었다.)

2. 실버 박사의 아이디어로 만든 특수갈퀴를 가져갈 수 있게 해줄 것

3. 망원렌즈도 가져갈 수 있게 해줄 것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확인목록과 플랜을 새로 짜야해서 빡빡한 비행계획과 훈련스케줄에 무리가 갈 수 있고

또한 여러 장비를 더 가져간다는 건 무게가 중요한 미션의 특성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으나

아폴로 15호의 이전보다 짧은 랑데뷰시간을 이용하여 임무중단용 연료를 줄이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논쟁이 끝나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착륙지점.

마리우스 크레이터와 해들리 열구가 남은 후보들이었다.

달의 생성원인도 뭐도 다 중요하지만 경치가 장관인 곳 또한 중요하다는 스콧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대원들 사기진작에 좋다는 의견)

해들리 열구가 최종적으로 선정된다.

다른 대원들과는 다르게 CMP였던 알프레드 워든은 약간 색다른 훈련도 추가로 받았는데

그는 이집트인인 파르크 엘-배즈와 함께 비행기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령선이 달 궤도를 도는 속도를 상정해서 지표면을 빠른 속도로 관찰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실버박사는 지질학 마지막 수업에서 그들이 발견할지도 모르는 사장암의 중요성을 연설한다.

해들리-아펜니노의 평원에 내린 그들은 시속 8-9마일로 월면차 '로버'를 사용해 꽤 먼 지역까지 이동하였는데

1차 선회활동에선 열류실험을 위한 드릴작업에 문제가 있었고 포기하고 돌아온다.

2차 선회활동에선 아주 오래돼 보이는 사장암을 채취한다.

코어샘플(심층표본)을 채취하기 위한 드릴작업이었고 중요한 작업중 하나라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스콧은 '팰컨'이라 불리는 이번 달 착륙선의 이름처럼 매의 깃털과 지질조사용 망치를 동시에 달표면에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맞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채취 당시 모두들 흥분했던 원시 달의 지각으로 보이는 사장암은 나중에 15415번 표본으로 분류되었고

일명 '제네시스 락(창세기 돌)'이라는 별칭도 얻는다.

아폴로 15호의 승무원은 과거 아폴로 12호의 백업 승무원이었던 멤버이다.

아폴로 12호의 승무원들이 전원 해군 출신자인 반면 이들은 또 전원이 공군 출신으로

양자간에는 우호적이면서도 은근한 경쟁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파트11 - 조강지처클럽>

각본 - 캐런 잰슨, 톰 행크스, 에릭 보크 / 감독 - 샐리 필드

남편들이 긴 근무시간,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는 동안

부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그려진다.

언론이나 패션쇼, 대통령과의 만남등 여러 외부활동

고위험 직종이었기에 잦은 사망사고들

외로움과 알콜중독

아이들의 보육 등 남편대신 많은 일을 혼자처리해야 했던 그녀들.

가정파탄과 이혼으로 가지 않는 가정이 드물정도.

"이혼녀보단 미망인이 나아."

- 그녀들끼리 수다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

자존심도 지킬 수 있고 미망인을 대하는 사회적인 불문율도 있기 때문에.

[드라마 방영 당시 그녀들의 행적]

팻 화이트(남편인 에드워드 화이트는 제미니 4호로 미국 최초 우주유영을 하였으며 아폴로 1호 사고로 사망)

 - 애드 화이트의 사망 후 재혼했었으나 83년 자살했다. 당시 우주비행사 부인들의 친목회를 조직 중이었다.

메릴린 시(남편인 앨리어트 시는 T-38 비행기 사고로 사망)

텍사스에 남아서 법원 속기사가 되었으며 다른 'New Nine(신참 9인)'의 부인들과는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제인 콘래드(남편인 피트 콘래드는 아폴로 12호에 참여)

- 89년 이혼 후 재혼하여 텍사스 서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초상화가이면서 미술관 전문 안내인이다.

잰 암스트롱(남편인 닐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에 참여)

- 94년에 이혼 후 산악휴양지 마을에 정착해서 활기차게 생활했다.

페이 스태퍼드(남편인 토마스 스태퍼드는 아폴로 10호에 참여)

- 86년 이혼 후 오클라호마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바버라 영(남편인 존 영은 아폴로 10호 16호에 참여)

- 72년 이혼했고 플로리다 북부의 한 목재 중개회사에 근무하다 얼마전 퇴직했다.

팻 맥디비트(남편인 제임스 맥디비트는 에드와 같이 제미니 4호에 탑승했었고 이후 아폴로 9호에도 참여)

- 84년에 간호학교를 졸업한 팻은 89년 이혼 후 오하이오 한 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매릴린 러벨(남편인 제임스 러벨은 아폴로 8호와 13호에 참여)

- 고교시절 남자친구였던 짐과 아직도 부부사이이며 손자, 손녀 9명 때문에 바쁘지만 관절염 연구회 이사로도 활동한다.

수전 보먼(남편인 프랭크 보먼은 아폴로 8호에 참여)

- 프랭크와 여전히 뉴멕시코에 살며 구식 비행기 복원 사업을 한다. 알코올과 약물중독 교육에도 적극 동참 중이다.

 

<파트12 - 달나라 여행>

각본 - 톰 행크스 / 감독 - 조너선 모스토우

[프롤로그]

수세기 동안 달나라 여행은 정신나간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신성한 존재 혹은 초인만이 그런 여정의 어려움과 거리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인간들은 중력을 거부하고 가능성의 한계를 재정의하면서 하늘을 날게 되었고
그 후로, 달은 인간이 잡을 수 있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달에 갈 수 있는 기계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죠.
언제, 어떻게, 누가 하느냐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습니다.
1968년 12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인류를 대표하는

24명의 우주비행사들이 달로 여행을 떠났고 그 중의 절반은 달 표면을 걸었습니다.
안전한 지구로부터 황량한 달까지 25만마일의 거리에 9번의 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각각의 여행은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여행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인간의 독특한 특성들이었습니다.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수단과 인내, 시간, 에너지.

심지어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려는 의지

그리고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시간의 노동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일마저 상상해내는 인간의 특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상상이 바로 지구에서 달까지의 여행을 위해 내디딘 첫 발이었습니다.

톰 행크스가 분한 장-뤽 데스퐁의 1954년 인터뷰 내용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조르쥬 멜리에스가 만든 영화 '달나라 여행'에서 촬영감독을 담당했었다.

조르쥬 멜리에스는 극중 바르방퓨이 교수역도 직접 했었다고 한다.

그들의 영화제작 장면에서 72년 12월 7일 발사대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폴로 17호로 화면전환된다.

17호 선장이었던 유진 서난과 달착륙선 조종사였던 해리슨 슈미트의 인터뷰가 계속된다.

이후 영화 '달나라 여행'과 17호 미션에 대한 이야기들이 중첩되며 진행된다.

딸과의 약속에 대해 말하는 서난 선장.

천재이자 도둑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파산한 불쌍한 멜리에스.

아폴로 우주비행사 중에서 유일한 과학자(지질학자)였던 슈미트는 마지막 월면보행 종료 후

달착륙선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해머 던지기를 하고

유진 서난은 딸과의 약속대로 달표면에 'TDC'라고 적는다.

그녀의 이름인 '트레이시 D. 서난'의 약자이다.

이제 달에 인류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인류는 오래지 않아 달로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역사가 내 신념을 확인해주면 좋겠다.

오늘 미국이 한 도전이 인류의 미래에 초석이 될 거라는 신념이다.

타우르스-리트로를 떠나는 우리의 마음은 달에 첫발을 내디딜 때와 같다.

신의 가호로 달에 다시 돌아올 때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 인류의 염원을 안고 올 것이다

아폴로 17호의 무사귀환을 기원한다.

- 유진 서난

에드 펜델은 월면차의 TV 카메라로 지구를 확대해서 찍기도 했지만

아주 중요한 미션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달 착륙선의 이륙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15호의 카메라는 이륙을 따라가지 못했고 16호는 지시를 내리는 시점이 늦었었다.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는 그가 컨트롤하고 화면으로 돌아오는데까지 6초의 시간차가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30년,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에 대해 윌리엄 브래드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하고 영예로운 행동에는 언제나 큰 역경이 따르지만

 용기만 충분하면 위대한 일을 행하고 큰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성취한 고속 발전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지식과 진보를 갈만하는 인간의 굳은 의지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이 동참하든 하지 않든 우주탐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탐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주탐사를 선도해야 합니다.

세계의 눈이 우주와 달과 태양계 너머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산업 분야의 선도적 위치 평화와 안정을 소망하는 마음

스스로와 세계에 대한 책임감 모두가 우주탐사에 뛰어들 것을 요구합니다.

전 인류를 위해 우주의 신비를 풀라고 요구합니다.

아직 우주에는 분쟁도 편견도 국가 간 갈등도 없습니다.

달은 누구에게나 위함하고 혹독한 곳입니다.

달 정복에는 가장 뛰어난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달에 갈 생각입니다.

우리는 달에 갈 생각입니다.

우리는 1960년대 안에 달에 가고 다른 위업들도 이뤄낼 생각입니다.

쉬운 일이어서가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달에 가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도전할 과제이며

미루고 싶지 않은 꼭 성공하고 싶은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 1962.9.12 라이스 대학 존 F. 케네디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우주비행사의 이름들이 스크롤된다.

Posted by 시고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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